스케치북 위에 흐르는 작은 음악
나는 늘 작은 스케치북을 가방 가장 가까운 곳에 넣어 둔다. 휴대폰보다 먼저 손이 가는 물건이다. 버스를 기다리며, 카페에서 주문을 기다리며,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들마다 나는 이 조그만 종이 위에 오늘의 공기를 옮겨 적는다. 옆 자리에서 졸고 있는 사람의 고개 기울기, 커피 잔에서 피어오르는 김, 멀리서 겹쳐 들려오는 엔진 소리까지, 연필 선으로 겨우 붙잡아 두는 느낌이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긁적이다가, 문득 머릿속에서 한 음이 울릴 때가 있다. 비스듬히 기댄 어깨는 늘 낮은 현악기처럼 보이고, 찢어진 포스터 조각들은 불협화음 같은 화음이 된다. 선을 한 번 더 긋는 순간,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리듬이 생기고, 리듬을 따라 허밍이 흘러나온다. 마치 눈에 보이는 것을 손으로 옮기는 동시에, 귀로 들리지 않는 음악을 같이 꺼내는 기분이다.
스케치북을 넘기다 보면, 며칠 전의 거친 선들 사이에서 멜로디의 씨앗을 발견하곤 한다. 어수선하게 겹쳐진 건물들의 윤곽은 반복되는 코드 진행이 되고, 좁은 골목 끝의 작은 불빛은 예상치 못한 전조처럼 느껴진다. 그때의 온도와 냄새, 마음의 무게가 손끝에 다시 돌아오면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그날의 선을 음으로 번역해 본다. 선의 굵기를 박자로, 여백의 넓이를 침묵의 길이로 바꾸어 가며 천천히 한 곡을 세운다.
그래서 나에게 그림과 음악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쌍둥이 같다. 하나는 순간을 눈으로 기억하게 해 주고, 다른 하나는 그 순간을 시간 속에서 다시 흐르게 만든다. 오늘 밤도 나는 침대 머리맡에 스케치북을 펼쳐 두고 잠이 들 것이다. 내일의 내가 이 페이지 위에서 또 어떤 소리를 발견하게 될지, 아직 그려지지 않은 선들과 아직 연주되지 않은 음들이 조용히 서로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