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이란 무엇인가 — 기다림과 고통, 그리고 탄생의 기쁨
나는 음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두 세계는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것 같지만, 정작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악보 위에 음을 올려두든, 캔버스 위에 색을 올려두든, 그 시작점에는 언제나 같은 질문이 맴돈다. “창작이란 무엇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하게 된다. 창작이란 엄마가 아이를 품고 세상에 내놓기까지의 모든 순간과 닮았다. 그 안에는 기다림과 고통, 그리고 마침내 태어나는 기쁨이 함께 있다.
품는 시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긴 기다림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영감은 언제 떠올라요? 갑자기 번쩍 하고 오는 건가요?” 그럴 때마다 나는 웃으며 말한다. “번쩍 하는 그 순간을 위해, 번쩍하지 않는 수많은 밤을 통과해야 해요.” 창작의 시작은 사실 영감이 떠오르는 찰나가 아니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시간을 견디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악기를 손에 쥐고도 건반 위를 맴돌기만 하는 날이 있다. 머릿속에서 하나의 선율이라도 흘러나오길 바라지만, 손끝은 마치 나에게 반항하듯 굳어 있다. 캔버스를 바라보면서도 첫 선을 긋지 못한 채, 빈 화면만 오래도록 응시한다. 그 시간은 마치 비가 오지 않는 긴 장마 같다. 구름은 잔뜩 끼어 있는데, 떨어지는 빗방울은 없다. “나는 이제 끝난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천천히 가슴 속으로 스며든다.
하지만 아이를 품고 있는 시간도 겉으로 보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변화들이 가장 깊은 안쪽에서 조용히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음악도, 그림도 그렇게 자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직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이미지들이 서로를 더듬으며 모양을 찾아간다. 나는 그저, 그 과정을 견디며 지켜보는 사람일 뿐이다.
통증: 미완성의 소음 속을 헤매는 밤들
어느 순간, 마침내 첫 음이 나온다. 혹은 아주 조심스러운 첫 선이 캔버스를 가른다. 많은 사람들은 이 지점을 “시작”이라고 부르지만, 내게 진짜 시작은 그 다음에 온다. 첫 음과 첫 선은 언제나 미완성의 소음과 뒤섞여 있다. 내가 원하는 소리는 이런 게 아닌데, 내가 꿈꾸던 이미지는 이런 빛깔이 아닌데, 눈앞에서 들리고 보이는 것들은 자꾸만 엇나간다.
악보 위에는 이미 수십 개의 마디가 쌓여 있는데,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운다. 코드 진행을 바꾸고, 리듬을 찢어발기듯 뒤흔든다. 하지만 여전히 어딘가 불협화음 같다. 귀를 찢는 건 실제 소리가 아니라, “이게 아니야”라고 속삭이는 내 안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때로 너무 날카로워서, 내 존재 전체를 부정당하는 기분마저 들게 한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형태가 드러난 순간부터, 캔버스는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정말 이 색이 맞아? 이 구도가 최선이야?” 덧칠을 하면 할수록 화면은 점점 무거워지고, 붓질은 점점 조심스러워진다. 한번 잘못 얹힌 색을 덮기 위해서는, 그 위에 수없이 많은 층을 쌓아야 한다. 손목이 아파올 때까지 팔을 움직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낳으려는 걸까?”
나는 이 시간을 ‘통증의 구간’이라고 부른다. 아이가 자라날수록 엄마의 몸이 점점 무거워지듯, 작업이 진행될수록 내 마음은 더 무겁고 불편해진다. 어쩌면 이 불편함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작품이 내 안에서 자리를 바꾸며 발버둥 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방향을 틀고 싶어 하는 존재와, 기존의 습관을 고수하려는 나 사이의 충돌. 그 사이에서 통증은 커지고, 나는 그 통증을 외면하지 않으려 애쓴다.
순간: 음악과 그림이 스스로 숨 쉬기 시작할 때
그러다 정말 갑작스럽게, 거의 아무런 예고도 없이, 모든 요소가 하나로 “맞물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마치 오래 삐걱거리던 문의 경첩에 윤활유가 스며들어, 어느 날 갑자기 부드럽게 열리는 것처럼. 악보 위의 한 마디, 혹은 캔버스 위의 한 붓질이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음악을 만들 때는 그 순간이 비교적 분명하게 찾아온다. 특정한 멜로디와 코드, 리듬이 서로를 감싸 안으며 하나의 호흡을 만들 때, 곡은 더 이상 내가 끌고 가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가 된다. 악보를 바라보는 내 몸이 먼저 안다. “아, 됐다.” 긴장했던 어깨가 풀리고, 횡격막이 넓게 열리며, 숨이 깊어진다. 이어폰으로 내 곡의 데모를 다시 들을 때, 나는 더 이상 ‘제작자’가 아니라, 처음 듣는 ‘청자’가 된다. 그때 비로소, 이 곡이 스스로 숨 쉬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그림에서는 그 순간이 조금 더 은밀하다. 전체 구도가 어긋나 보이던 화면이, 아주 작은 색의 변화 하나로 균형을 되찾을 때가 있다. 혹은 거의 버리다시피 했던 선 하나가, 갑자기 화면 전체를 지탱하는 축이 되어준다. 그때 나는 붓을 내려놓고 한 발짝 물러서서 캔버스를 바라본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린다. “이제, 너는 나 없어도 되겠구나.” 그때 느껴지는 감정은 안도이자, 약간의 서운함이기도 하다. 내 몸 안에 있던 아이가, 이제 세상이라는 낯선 공간을 향해 걸어 나가는 순간처럼.
희열: 타인의 박수 대신, 나와 작품이 이어지는 감각
많은 이들이 창작의 기쁨을 “성공”과 연결 짓는다. 조회수, 좋아요, 전시 관람객 수, 판매량. 물론 그런 지표들이 주는 짜릿함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 내 음악을 반복 재생 목록에 넣고, 내 그림 앞에서 한참을 머물러 준다는 건 분명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더 분명하게 깨닫는다. 진짜 희열은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그림과 음악 속에 온전히 묻어날 때 찾아온다는 것을.
어떤 곡은 세상에 나왔을 때 거의 아무 반응도 얻지 못했다. 재생 수는 초라했고, 반응도 뜨뜻미지근했다. 하지만 그 곡을 만들던 밤을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녹음을 마치고 스튜디오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혼자 그 데모를 다시 들었을 때, 나는 조용히 울었다. 누구 때문도, 무엇 때문도 아닌 눈물이었다. “아, 내가 느끼던 그 말을 끝내 음악으로 옮겨놓았구나.” 그 깨달음이, 외로운 나 자신에게 건네는 가장 깊은 위로였다.
어떤 그림은 전시에 나가지도 못했다. 너무 개인적이라는 이유로, 혹은 아직 미완성이라는 이유로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그림들. 하지만 작업실의 벽에 조용히 걸어둔 그 그림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잠시 멈춰 선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손을 얹는다. “그때의 나는, 이만큼의 솔직함을 견뎌냈구나.” 이 감각은 타인의 박수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빛을 내뿜는다. 아주 은은하지만, 오래 남는 빛이다.
텅 빈 박수의 메아리, 그리고 조용한 충만함
반대로, 외부의 인정만을 좇으며 작업하던 시기도 있었다. 유행하는 사운드를 억지로 따라 하거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색감과 구도를 계산해가며 그림을 그리던 때. 그때는 발표 직후의 반응이 전부였다. 수치가 오르면, 짧은 쾌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쾌감은 항상 너무 빨리 사라졌고, 남는 건 묘한 공허함이었다. 마치 남을 위해 준비한 잔치에서, 정작 나 자신은 한 입도 먹지 못한 채 뒷정리만 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이 작품이 세상에서 완전히 잊히더라도, 나에게는 여전히 의미가 있을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는 작업이라면, 결국 나는 그 작품과 함께 오래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부의 인정은 바람과 같아서, 불어올 때는 뜨겁지만, 한 번 방향을 틀면 금세 사라진다. 하지만 내가 나에게 건네는 인정은 땅과 같아서, 더디지만, 밟을수록 단단해진다.
창작의 길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당신에게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창작의 길 위에서 길을 잃은 것 같다고 느끼고 있다면, 나는 조용히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느끼는 기다림과 고통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탄생의 예고이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하루, 써놓은 모든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밤, 덧칠해도 덧칠해도 만족스럽지 않은 캔버스. 그 모든 순간이 바로, 당신 안에서 무언가가 자라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너무 서둘러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재능이 없어”, “나는 끝났어”라는 선언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넌 의미 없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몸을 열어두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러나 두려움에만 갇히지 않도록 단단하게.
그리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진짜 희열은, 타인의 숫자로 셈해지는 것이 아니다. 진짜 희열은,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그림과 음악, 혹은 어떤 형태의 작품 속에 온전히 묻어날 때 찾아온다.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박수를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과 작품 사이의 깊은 대화를 완성한 사람이다.
창작이란 결국, 나 자신을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과정이다. 기다림과 고통, 그리고 마침내 태어나는 기쁨.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오늘도 나는 악보 위에, 캔버스 위에, 조용히 손을 얹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떤 것에게 인사를 건넨다. “천천히 와도 돼. 나는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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