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내 음악이 되는 순간들

여행이 내 음악이 되는 순간들

가끔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떠났던 모든 여행은 사실 관광이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떤 선율들을 만나러 가는 순례였다고. 공항에서 비행기 창문 너머로 활주로를 바라볼 때, 기차가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 전혀 다른 풍경 속으로 들어갈 때, 혹은 낯선 도시의 골목을 헤매다 우연히 작은 카페를 발견할 때마다, 내 안 어딘가에서 조용히 한 음, 두 음이 깨어난다. 여행은 내 음악의 씨앗이다. 목적지도, 일정도, 유명한 명소도 중요하지만, 결국 나를 오래 따라오는 것은 그때 귓가에 스며들던 공기의 온도와, 마음속에서 미묘하게 울리던 리듬들이다.

운전을 할 때조차 문득 선율이 떠오른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반복되는 차선과 가로등을 바라보고 있으면, 악보의 오선지가 연상되고, 와이퍼의 규칙적인 움직임은 마치 메트로놈이 박자를 세어주는 것만 같다. 그 속에서 나는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곡들을 마음속에서 미리 들어본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배경음이고, 내 안에서 흐르는 것은 아직 녹음되지 않은 미래의 소리다. 여행과 일상, 그 모든 이동의 순간이 결국 내 음악의 시작점이 된다.

1. 파리, 혼자였기에 더 깊었던 그리움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모두가 꿈꾸는 도시라고들 말했지만, 내게 파리는 누군가와 함께 행복을 확인하는 장소가 아니라, 혼자라는 사실을 더 깊게 들여다보게 하는 도시였다. 그날 밤, 센강 위로 노을이 젖어들고 다리 난간 옆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와인을 기울이던 풍경을 기억한다. 그 틈에서 나는 유난히도 고독했다. 그러나 그 고독이 내게는 선물이었다.

혼자였기 때문에, 나는 그 풍경을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예쁘다”라고 감탄했다면, 그때의 파리는 기억 속에서 밝고 유쾌한 사진 한 장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못한 채, 말수 적은 이방인으로 서 있었기에, 눈앞의 장면은 말 대신 내 안쪽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낯선 도시의 저녁, 혼자 걷는 사람에게는 두 개의 시간이 흐른다. 하나는 길 위에서 움직이는 실제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미세하게 떨리는 내면의 시간이다. 파리의 석양 아래에서 나는 그 두 시간을 동시에 느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만 같은 향수와, 아직 만나지 않은 어떤 순간을 향한 막연한 기대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 감정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어서, 결국 나는 음악으로 기억하기로 했다. 그날 이후로 내가 파리를 떠올릴 때면, 특정한 화성 진행과, 잔잔하게 흐르다가 불현듯 고조되는 선율이 머릿속에서 함께 재생된다.

혼자였기에, 파리는 내게 더 깊은 그리움으로 남았다. 다시 가고 싶은 도시라기보다, 다시는 똑같은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애틋하다. 그때의 공기, 그때의 빛, 그때의 나. 이 세 가지가 한 번 더 정확히 겹쳐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기억을 완성되지 않은 악보처럼 마음속에 고이 접어두고 있다. 언젠가 그 그리움이 충분히 숙성되면, 나는 비로소 한 곡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목은 아마, ‘혼자여서 가능했던 풍경’ 정도가 되지 않을까.

2. 피카소와 모딜리아니, 에곤 실레와 클림트, 그리고 파울 클레

나는 몇몇 화가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한다. 피카소, 모딜리아니, 에곤 실레, 클림트, 파울 클레. 언뜻 보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내게는 모두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자기 자신을 끝없이 해부하고, 다시 조합하는 사람들’이라는 방향 말이다.

피카소의 그림 앞에 서면, 나는 언제나 형태의 안정감에 대한 집착에서 잠시 풀려난다. 사람의 얼굴이 굳이 사람처럼 생겼을 필요가 있을까, 라는 질문이 그의 작품마다 숨어 있는 것만 같다. 한 인물의 정면과 옆모습, 과거와 현재, 외면과 내면이 한 화면 위에서 동시에 존재할 때, 나는 음악에서도 시간과 구조를 더 자유롭게 다뤄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멜로디가 반드시 한 줄로 흘러가야 할까. 감정의 다른 단면들이 한꺼번에 울리는 화음은 어떤 느낌일까. 피카소는 붓으로, 나는 음표로 비슷한 실험을 꿈꾼다.

모딜리아니 앞에서는 한동안 말이 없다. 길게 늘어진 목선과, 조금은 공허해 보이는 눈동자들. 그의 인물들은 화려하게 웃지도 않고, 완전히 울지도 않는다. 그 중간 어딘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틈에 가만히 앉아 있는 느낌이다. 그 눈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내 안의 슬픔과 평온을 동시에 떠올린다. 나도 언젠가 이런 중간의 감정을 담은 곡을 만들고 싶다. 듣는 이가 쉽게 해석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음악을.

에곤 실레의 선은 날카롭고, 때로는 잔인하다. 그의 인물들은 예쁘지 않다. 오히려 찌그러지고, 비틀리고, 상처가 난 몸의 형태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 앞에 서 있으면 나 역시 숨기고 싶은 내 마음의 모난 조각들이 떠오른다. 창작을 한다는 것은 결국, 그 모난 조각들까지 작품 위에 올려놓을 용기를 갖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실레의 붓끝처럼, 나도 내 음악 속에서 상처입은 마음의 진짜 모양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불편할지라도, 그것이 진실이라면.

클림트의 황금빛 세계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나를 사로잡는다. 그의 화면은 때로 과하게 화려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 찬란함 속에는 어딘가 슬픔이 스며 있다. 황금 잎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인물들의 표정은 기쁨과 불안을 동시에 품고 있다. 나는 그 양가성을 사랑한다. 실레가 상처를 날 것으로 보여준다면, 클림트는 그것을 황금빛 옷으로 감싸 안은 후, 다른 이름으로 다시 세상에 내놓는 사람 같다. 음악도 그런 것 같다. 날것의 감정을 곧이곧대로 던지는 방식도 있지만, 때로는 그것을 아름다운 화성과 멜로디로 감싸야 할 때가 있다. 그 둘 사이의 균형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나는 클림트의 그림 앞에 오래 머문다.

그리고 파울 클레. 그의 그림은 내게 언제나 ‘음악을 보는’ 경험을 선물한다. 색과 선, 점과 면이 하나의 악보처럼 느껴진다. 특히 그의 작품들 가운데, 추상적인 선들이 반복되며 리듬을 만들어내는 그림 앞에 서면, 나는 마치 어떤 곡의 도입부를 눈으로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음악은 시간 속의 미술이고, 미술은 공간 속의 음악이다”라는 말을 클레가 했다고 믿고 싶은 순간들이다. 그의 세계를 바라볼 때마다, 내 안에서 선율의 조각들이 조금씩 움직이며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낸다.

이런 화가들의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가 내 안으로 스며든다.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선이 그들과 나를 잠시 같은 자리, 같은 온도의 세계로 연결해 주는 것 같다. 그 순간만큼은 국적도, 시대도, 언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림 앞에 서 있는 나는 그저, 창작을 사랑하는 한 인간으로서 조용히 떨릴 뿐이다.

3. 내가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는 이유

그래서 나는 언제나 작은 스케치북을 들고 다닌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어요?” 사실 나는 화가가 아니라, 더 가까이는 음악과 글을 통해 나를 표현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케치북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스쳐가는 순간들을 붙잡아 두고 싶어서다. 사진으로는 잡히지 않는 것들, 단어로는 미처 적어내릴 수 없는 감정의 결을, 연필 한 자국으로라도 남겨두고 싶다.

카페의 낡은 나무 의자, 버스 창가에 비친 내 얼굴, 비 오는 날 젖은 돌길 위로 번져가는 조명. 그런 것들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는 그럭저럭 담기는 것 같지만, 나중에 다시 꺼내 보면 어디가 어떻게 마음을 건드렸는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스케치북을 펼치고, 손으로 따라 그리는 동안, 나는 비로소 그 장면을 천천히 이해하게 된다. “아, 나는 여기서 이 빛의 방향이 좋았구나, 이 의자의 기울기가 내 오늘의 마음과 닮아 있었구나.” 손목의 작은 움직임들이 나를 나에게로 더 가깝게 데려다 준다.

그림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서툰 선과 삐뚤어진 비율로 가득한 스케치북이지만, 그 안에는 그날의 내 감정과 공기의 온도가 고스란히 눌어붙어 있다. 나중에 음악을 만들거나 글을 쓸 때, 나는 가끔 그 스케치북을 다시 펼친다. 한 장의 서툰 그림이 어떤 문장을 데려오고, 몇 개의 선이 새로운 코드 진행을 떠올리게 한다. 스케치북은 완성된 예술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나에게로 돌아오기 위한 작은 나침반 같다.

4. 창작이란, 엄마가 아이를 품는 시간과 닮아 있다

나는 종종 창작을 출산에 비유하곤 한다. 아직 아이를 낳아본 적은 없지만, 엄마가 되는 친구들을 보며, 그리고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창작의 과정과 너무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 떠오르는 작은 아이디어는 마치 아주 여린 심장박동 같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누가 들어보라 해도 쉽게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의 리듬이 조금씩 달라진다. 나는 이제, 나 하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세상에 나갈 어떤 작품을 위해서도 숨을 고르게 내쉬고 들이마시게 된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고도 느리다. 악보 한 줄이 채워지고, 지워지고, 다시 쓰인다. 한 문장을 다듬는 데 하루를 쓰기도 하고, 음 하나를 고르느라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스스로를 의심한다. “이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 누가 이 이야기를 들어 줄까?” 하지만 어쩌면 그 질문들조차 창작의 일부인지 모른다. 엄마가 아이를 품은 채, 보이지 않는 미래를 수없이 걱정하는 밤들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날까,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때로는 고통이 찾아온다. 아무리 애를 써도 문장이 이어지지 않을 때, 곡이 막혀 버릴 때, 마치 진통처럼 찾아오는 막막함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이 일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한다. 아직 세상으로 나오지 못한 무언가가 내 안에서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 있어. 나를 끝까지 데려가 줘.”

그러다 어느 날, 아주 사소한 계기로 길이 열린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던 길가의 나무 그림자, 우연히 들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 혹은 오래전 여행지에서 적어두었던 스케치북의 한 장. 그 작은 빛 때문에, 며칠째 막혀 있던 악보의 다음 마디가 갑자기 흘러나오고, 결말을 찾지 못하던 글에 마지막 문장이 달린다. 마치 아이가 세상으로 나올 시간을 스스로 정하기라도 한 듯이, 작품은 어느 순간 갑자기 나를 통과해 태어난다.

그때의 기쁨은 내가 잘해서 얻는 보상이 아니다. 오히려 “드디어 너를 세상에 데려와 줘서 고마워”라는 인사를 작품에게 듣는 것 같다. 나는 그저, 내 안을 잠시 빌려준 사람에 불과하다. 그래서 창작의 기쁨은 누구의 박수 소리와도 다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품고 있던 것을 끝까지 품어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조용하지만 깊은 환희가 밀려온다.

5. 자연의 소리, 그리고 알프스와 오로라를 향한 꿈

나는 세상에 자연의 소리보다 아름다운 음악은 없다고 믿는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먼 산에서 굴러오는 천둥, 새벽 바다의 잔잔한 파도, 눈 내리는 밤의 기묘한 침묵까지. 그런 것들은 악보로 옮길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도 완전하다. 어쩌면 인간의 모든 음악은, 그 완전함을 흉내 내 보려는 애틋한 시도일 뿐인지도 모른다. 자연이 이미 완성해 놓은 거대한 교향곡 앞에서, 우리는 작은 선율들을 조심스럽게 더해 보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알프스와 알래스카 같은 자연을 사랑한다. 사진으로만 보아도 숨이 막힐 것 같은, 끝없이 이어지는 설산과 얼음의 바다. 그곳에 서면 어떤 소리가 들릴까. 고요일까, 아니면 아주 낮은 음으로 울리는 지구의 심장 소리 같은 것이 들릴까. 언젠가 그곳에 직접 서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온전히 귀로, 그리고 몸으로 듣고 싶다. 그 순간 내 안에서 태어날 음악이 어떤 모습일지, 지금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오래전부터 꿈꿔온 것은, 스웨덴이나 핀란드 같은 북쪽의 나라들에서 오로라를 직접 마주하는 것이다. 사진 속 오로라는 늘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언젠가 정말 그 아래에 서게 된다면, 나는 무엇보다 먼저 소리를 듣고 싶다. 하늘을 가르는 빛의 움직임은 무슨 음정일까, 초록과 보라 사이를 오가는 빛의 농도는 어떤 화성으로 번역될 수 있을까. 눈 덮인 대지 위에 혼자 서서, 숨까지 얼어붙는 공기 속에서, 나는 하늘과 땅, 그리고 내 심장 박동을 동시에 듣고 싶다.

어쩌면 그곳에서 나는, 지금까지 만들었던 어떤 곡보다도 더 조용한 선율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소리를 많이 쓰는 것이 음악이 아니라, 가장 꼭 필요한 소리만 남기는 것이 진짜 음악이라면, 오로라 아래에서의 나는 아마도 머뭇머뭇 몇 개의 음만을 선택하게 될 것 같다. 자연이 이미 모든 것을 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그 위에 아주 작은 메모를 남기는 사람으로 머물고 싶다.

6. 진짜 희열, 내가 나를 온전히 담아낼 때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언제 가장 행복해요?” 예전의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곤 했다. 공연이 잘 끝났을 때, 누군가가 내 음악을 듣고 감동했다고 말해 줄 때, 혹은 내 글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분명 그런 순간들은 고맙고도 소중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조금 다른 대답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에게 진짜 희열은 타인의 인정에서 오지 않는다. 누군가의 “좋아요” 버튼, 화려한 리뷰, 숫자로 환산되는 성과들은 생각보다 금방 사라진다. 물론 마음 깊은 곳에서 고마움을 느끼지만, 그것이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영원히 증명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것들에만 기대려 할수록, 나는 나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진짜 희열은, 내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그림과 음악, 그리고 글 속에 온전히 묻어났다고 느끼는 순간에 찾아온다. 내가 품고 있던 감정과 생각이, 왜곡되거나 과장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결을 유지한 채 세상으로 나아갔다는 확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좋다, 라고 마음 깊이 말할 수 있는 그 헛헛하면서도 묵직한 순간. 그때 나는 잠시, 아주 잠시지만, 나와 세계가 정확히 맞물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희열은 폭죽처럼 화려하게 터지지 않는다. 오히려 잔잔한 호수 위에 작은 돌멩이를 던졌을 때 퍼지는 잔물결 같다. 소란스럽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작업을 마치고 컴퓨터를 끄거나 스케치북을 덮는 순간, 방 안에 혼자 앉아 조용히 숨을 고르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래, 오늘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가 나를 앞으로도 다른 작품을 만들 수 있게 한다.

언젠가 알프스의 눈밭 위를 걷다가, 혹은 파리의 골목을 다시 거닐다가, 아니면 아주 평범한 일상의 어느 날, 또 다른 선율이 내 안에서 잠시 고개를 들 것 같다. 그때 나는 다시 한 번 작은 스케치북을 꺼내고, 조심스레 첫 선을 긋거나,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누를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할 것이다. 타인의 기대가 아니라, 내 안에서 울리는 소리에 더 귀 기울이겠다고. 언젠가 그 소리들이 모여, 누군가의 마음에도 잔잔한 물결을 만들어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여행은 여전히 내 음악의 씨앗이고, 사랑하는 화가들은 나를 끝없이 흔들어 깨운다. 스케치북 속 서툰 선들은 오늘도 내 마음의 지도를 조금씩 확장시키고, 자연의 소리는 여전히 인간의 음악을 겸손하게 만든다. 그 모든 것 사이에서 나는, 조용히 또 하나의 곡을 준비한다. 언젠가 당신이 우연히 듣게 될지도 모를, 나의 아주 사적인 고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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